
<『Death of Sapphira』, Nicolas Poussin 1652>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1-2)
4장 마지막 부분에서 요셉이라는 사람, 별명은 ‘바나바’가 사도들 앞에 자기 땅을 팔아서 모두 하나님께 바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요셉이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존경과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 같은데, 이를 따라하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인데,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입니다. 그런데, 이 아나니아는 자신의 소유을 팔아서 일부는 자기 수중에 두고, 사도들에게는 자신의 재산 전부를 드린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요셉과 다른 이들의 헌신과 섬김을 본받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지만, 이 아나니아는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내 삽비라(‘아름답다.’)도 옆에서 그것을 보고 알았지만, 남편이 사도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3-4)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잘못된 점을 지적합니다. 왜 하나님을 속이냐는 것이지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가식과 위선의 행동이 참 많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줄 알았지만, 아나니아는 하나님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속으실 분입니까? 대체적으로 아무 소리를 하지 않으시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도 여전히 가식과 위선으로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속이려는 것이 ‘사탄’의 주된 일인데, 사람은 속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탄의 꾀임에 속아서 사도들을 속이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속이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재산을 팔아서 일부만을 드린 것을 문제삼지 않습니다. 아나니아의 재산이니 네 것을 일부만 드린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하지요. 하나님을 속이려는 그 마음 가짐과 행동을 문제 삼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의 반응은 그런 책망과 잘못을 듣고서도 회개하거나 죄를 자복하지 않습니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5)
그 결과,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게 됩니다. 말씀을 오해하면, ‘하나님께 바칠 때, 다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심판을 받게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단 사이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역사와 인간의 멸망의 대표적인 표본을 보여 줍니다. 우리 인간이 멸망당하고 심판을 받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다 사탄에게 속아서 ‘죄’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를 통해 그 죄 문제에 대해서 지적을 받고, 회개를 촉구함에도 바르게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과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일원이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마음과 생각 속에 ‘사탄’이 가득했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는 사탄의 생각과 마음이 없을까요? 더 가득할지 모릅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끝도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자신의 것을 모두 바치겠다고 마음 먹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멸망을 받아야 할까요? 또한 우리가 간교하게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는 일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의 목회자가 베드로 사도와 같이 신령하거나 영적으로 분별력이 뛰어납니까? 교우들이 어떤 악한 생각과 의도가 있는지 즉시 보고 판단이 됩니까? 대부분 그렇지 못합니다.
한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떠난 사람이 여기 저기 떠돌면서 지역교회를 옮겨다녀도 아무런 제제가 없고, 자기 교회에 오면 목회자들은 환영하고 바쁩니다. 그리고 물질이 있는 사람이 오면 더욱 환영하지요. 거렁뱅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사람에게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물질을 갖다 바친다고 해서 아나니아를 특별히 더 챙기거나 환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악을 드러내어 회개시키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6-8)
잠깐의 시간 차이가 있었는데, 그 사이 교회 장례가 치러졌고, 남편이 오지 않자 아내 삽비라가 교회로 와서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남편이 죽었다는 사망 소식을 전하기 보다 아나니아의 일에 동일하게 가담했는지 삽비라에게 묻지요. 삽비라도 남편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사도 앞이지만, 하나님 앞이라고 생각하고 정직하게 아니라고 말했다면 좋았을 것을 역시나 남편과 입장이 같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9-11)
그 남편의 그 아내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동일하게 책망을 하고 삽비라도 역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다시 질문합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가? 너는 죄가 없느냐?’ 그때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고백해야 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도둑이요 형제 자매를 미워한 살인자입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러나 안타깝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도둑인지 모르고, 자신은 죄가 없다고 사탄에게 속아 스스로를 속이며, 하나님도 속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더 살피게 되고, 감히 교만할 수 없으며, 죽을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와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2-13)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 병을 고치는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증거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자유와 해방을 주셨지만, 한편으로 유대인의 종교 권력자들에게는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놀라운 기적을 보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어정쩡한 사람들이 많은 것이지요. 심중에는 예수를 믿고 싶지만, 믿었다가는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고 유대인 사회에서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무시와 경멸을 받게 되니, 예수님을 믿는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병든 자가 낫고, 가난한 이들이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되니까 착하고 선한 일에 대해서는 좋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14-16)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들은 어차피 일도 잘 못하고, 살아갈 여유가 없으니 차라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오는 것이 병도 낫고 먹을 것도 나누니 믿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재산상이나 명예나 지위를 손해보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진짜 그리스도인이지요. 큰 결단과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제 점점 말세가 되면, 부가 양극화가 되듯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양극화가 됩니다. 진짜로 믿는 사람과 믿음을 떠나 아주 안 믿는 사람들의 곁으로 가게 될 사람들로. 왜냐하면,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일이 사회에서 손해를 보는 일이 점점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믿는 사람들은 더 신실하고 더 정결해 질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17-20)
성도들을 이끌던 사도들이 재차 감옥에 갇힙니다. 왜냐하면, 지난 번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는데, 다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말씀도 전했기 때문입니다. 전에 유대 의 공회의 명령으로 예수님을 전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사도들에게는 더 권위가 있으니까 종교 지도자들의 말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이 유대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위와 법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가 나타나 저들의 명령을 무시하고 복음을 계속 전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이런 명령을 수행하라고 합니까? 감옥에서 전하라고 하면 하겠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새벽에 옥문이 열립니다. 그래서 갇혔던 사도들이 나가서 새벽부터 주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직 관리나 관원들이 아침에 출근하여 업무를 보기도 전에 벌써 주의 일은 시작된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새벽을 중시합니다. 예수님도 한적한 곳에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뜻을 잘 받들기 위해, 새벽부터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시간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21-26)
새벽에 빠져 나간 줄도 모르고, 대제사장과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사도들을 다시 심문하고 재판하려고 오전에 와서 앉아 있습니다. 확인하니까 죄수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탈출을 했는가 싶어, 간수들은 참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어디에 있는지 사람들을 풀어서 찾았겠지요. 그랬더니 성전에 가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말 죄가 있고 잘못이 있으면, 예루살렘을 빠져나가서 줄행랑을 쳐야지, 왜 성전에 가서 말씀을 전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두려운 사람들은 다른 곳에 숨어있을 텐데, 사도들은 주님의 뜻대로 공개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나니아란 사람은 바나바라고 불리는 요셉의 행동을 따라했습니다. 그 마음에 교회로부터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동시에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하고 싶은 욕심과 유혹이 있었습니다. 비단 아나니아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여전히 세상 가운데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싶고, 또한 교회 안에서도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하나님을 속이고 사도들을 속이고자 했습니다. 그의 아내 삽비라 또한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저희들도 이런 잘못된 생각과 교만과 욕심을 가졌는지 돌아보고 항상 정직하게 주님을 섬기게 도와주옵소서!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도둑질하는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항상 주님 앞에 청지기의 자세로 겸손히 살아 가게 도와 주옵소서!
주님을 전하는 사도들과 성도들이 계속되는 박해와 사회적 압박과 고난이 있음을 봅니다. 세상의 법과 질서보다 주님의 명령을 더 무겁게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주님 나라를 위한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삼아 주옵소서! 세상을 이기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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