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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누가복음] 5장 베드로,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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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7회 작성일 2025-06-04 1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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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적으로 잡은 물고기”, 라파엘, 1515) >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1-2)

 

 예수님은 수많은 대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게네사렛 호숫가에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회당(synagogue)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예수님의 행적을 ‘누가’가 기록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수많은 대중들에게 설교를 하셨지만, 관심은 그 곁에서 그물을 씻고 있던 어부들에게 있었습니다. 

 

 한 배는 ‘베드로’의 배였고, 또 다른 배는 ‘야고보’와 ‘요한’의 배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물고기를 잡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작은 물고기 배라고 해서 결코 값싸지 않습니다. 왠만한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형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어느 정도 생계가 안정되어 있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품꾼들도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작은 중소기업 사장쯤은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3)

 

 예수님은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 때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아닙니다. ‘구면(舊面)’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올라 타셔서, 조금 육지와 거리를 두도록 요청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연 환경을 잘 사용해서 말씀이 잘 전달되게 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합니다.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잘 들을 수 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베르도’이지요. 이미 예수님께서 첫 만남을 통해서 ‘게바’,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는데, 바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재차 베드로에게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4)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 보상(報償)을 하려고 하십니다.  그 방법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수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처럼, 앞으로 수많은 생명을 건져낼 것이란 상징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해서 5천 명이나 하루에 회개하고 돌이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

 

 베드로는 이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어부로서 하루 이틀을 일한 것이 아닙니다. 어부로서 잔뼈가 굵었는데, 밤부터 오전까지 아무리 그물질을 해도 단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고생한 보람이 없지요. 베드로나 야고보와 요한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보통 때라면, 깊은 곳에 물고기 없어야 하는데, 왜 그곳에 몰려 있었을까요? 어부들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다 동원해도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는, 평상시 같으면 이런 일이 거의 없는 일이 왜 일어났을까요?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같은 전문가가 밤새도록 물고기를 못 잡고, 그물을 정리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한 번 순종해 보겠습니다’ 합니다. 일반 선생이 하라고 하는 것이었으면 전혀 베드로는 실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떠했기에,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까요?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와 능력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6)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다시 깊은 곳에 내리니까, 물고기들이 도망도 가지 않고, 사로잡힙니다. 베드로는 그물이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니까 야고보와 요한을 부릅니다. 그들이 베드로의 그물을 같이 들어올리니까, 베드로의 배에 다 실을 수가 없어서 자기 배에도 채우는데, 그 두 배에 가득하게 됩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베드로 뿐만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횡재했지요. 밤새도록 고생해서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예수님 말씀 한 마디에 ‘대박’이 난 것이지요. 그 뒤 베드로는 예수님께 ‘우리 한 번 동업해서 이 호수의 물고기를 모조리 잡아 봅시다.’ 하면서 사업상의 제안을 한 것이 아닙니다. 돈을 밝히는 사람 같으면, 그렇게 했을 것인데, 베드로는 갑자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8-10a)

 

 베드로의 반응이 참 의외입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계속 좀 지도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떠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놀라서’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예지력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배에 올라서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죄의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보다 베드로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해서 확인하게 된 것이지요. 

 

 예수님의 메시지를 유추해 보면, ‘죄’로 인한 파멸과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베드로는 마음에 찔려서, 이제 곧 예수님에 의해 자신의 죄가 드러나면, 자신은 곧 파멸을 맞을 것이란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곁에 모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진실로 만나고 경험하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것이 ‘경외’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물고기들을 모조리 잡아서 그물에 걸리게 만드셨습니다. ‘온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해서 잡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다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다 아시는 분이 예수님이고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조리 다 잡아들일 것입니다. 그 죄값을 톡톡히 치르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물에 물고기들이 잡힐 것이라고 꿈엔들 생각했을까요? 우리 인간이 꼭 물고기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베드로는 그런 두려움을 예수님을 통해서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10b-11)

 

 그러나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심판하시려고 그물질을 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그물비유가 있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마 13:47-48) 

 

 예수님은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 일군들로 베드로와 어부들을 부르십니다. 험한 파도와 물결이 일어도 그 악천 후 속에서도 그물을 붙잡고 사명을 감당하는 어부들이 하나님 나라 사역에 참 적합한 인재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리쿠르팅을 하십니다. 예수님(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될 것이 없습니다. 참 적절한 선출입니다. 

 

 예수님은 미래에 역경을 이겨내고 사명을 감당하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십니다. 지금은 비록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같은 존재이지만, 예수님 손에 붙들려서 다듬어지고 깎여지고 하면서 참 제자가 되어 갑니다.

 

 이제, 어부가 아닌 다른 제자 특히 세리로 일했던 ‘레위’ (마태) 를 부르심을 살펴볼 것입니다. 27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7-28)

 

 세리였던 ‘레위’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관세를 받는 직원입니다. 레위는 가버나움의 세관에서 세리로 일했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은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 요지였고, 이 지역을 통과하는 상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국립세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레위는 이 세관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단번에 레위는 결단합니다. 그 세리가 얼마나 연봉이 높은 직업인데, 그것을 마다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 결단력을 우리들은 배워야 합니다. ‘돈’을 너무 사랑하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29-30)

 

 레위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자기 집으로 예수님과 제자들과 자기 지인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그 의미는 이제 자신은 세리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레위의 초대에 응하시고 그의 친구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의 명성에 금이가기 시작했지요. 세리의 친구들이 다 대게 세리들이지요. 이들이 많은 세금을 거두어 로마 황제에 바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공인된 죄인으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세금은 바치지만, 그 분노를 이 세리들에게 표출하는 것이지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그래도 양심적인 세리도 있지만 도매급으로 비방을 받습니다. 

 

 세리가 세금을 거둘 때, 반발하는 사람들을 누르고 억지로 뺏어야 하는 도우미(?)들이 필요합니다. 여기서는 ‘죄인’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쉽게 말하면 조폭입니다. ‘어깨들(?)’ 아무튼 이런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어울리시는 예수님은 이들조차도 구원하시려고 뜻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 제자로 공인된 죄인인 세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떤 죄인도 돌이키실 수 있는 분이며, 그런 사람들을 들어서 쓰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세상의 왕들이나 지도자들은 대체로 학벌이 높고, 지위가 있으며 실력이 있는 사람들로만 자기 사람으로 삼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인들을 불러서 회개시킬 뿐만 아니라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쓰는 예수님이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장 위대하시고 참 스승이시고, 지도자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1-32)

 

 예수님은 참 하나님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많이 훼손된 인간이지만, 예수님께 오면, 온전히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병자’ 취급해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실은 죄인이며, 심판을 받아 마땅한데, 아픈 병자를 의사가 고치듯이 죄인을 회개시키고 바른 인성과 성품의 참 사람으로 고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고장(?)났다고 생각하면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가 뭐가 잘못되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께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3-35)

 

 유대인들은 ‘금식’과 ‘기도’를 매우 경건한 신앙인의 지표로 삼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금식을 안 하시고, 늘 제자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보이니까 불경건하게 보이시죠. 우리가 전에 봤지만, 예수님은 이미 40일 금식하셨지요? 그런데, 금식은 왜 하는 것입니까? 자기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 앞에 겸비하기 위함이고 은혜를 간구함입니다. 예수님은 본인 죄가 커서 금식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이고, 친히 인간의 모든 고통과 고난을 당하셔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먹이시기 위함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교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시시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이 여기 저기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으면서, 혼자 중얼거리면서 그것을 기도한다고 자랑하니 참 어이가 없는 상황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제자들을 빗대어 예수님을 비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두둔해 주시고, 변호하십니다. 지금은 예수님 곁에서 있으니, 기쁨의 날 마치 결혼식에서 신랑과 함께 피로연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금식’할 수 있느냐 하시며 반론하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지.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다면, 금식해야 합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자기 죄를 자복하면서, 침상을 눈물로 적시면서 가장 간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시 51:11) 하는 것입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36-39)

 

 ‘새 옷’은 예수님 때문에 받은 우리의 새로운 신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새 신분을 받았는데, 다시 유대인으로 살 필요가 있을까요? 이 부분은 사도 바울 시대에 가장 강하게 변론되었던 부분입니다. 

 

 새 포도주는 ‘주의 말씀’입니다. 옛 포도주는 ‘율법’이지요. 율법에 얽매어 있는 사람은 항상 그 율법이 최고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지요. 그 율법이 우리를 거룩하게 못하고 그 율법의 끝은 심판일 뿐입니다. 그 심판을 면하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율법도 알아야 하겠지만, 새로운 신분을 주신 예수님을 기뻐하고, 그의 말씀을 따를 뿐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가장 바르고 정확하게 해석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율법도 본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삼위의 하나님이 직접 주신 말씀의 본 뜻을 가장 잘 알지, 그 말씀을 받은 모세의 한참 후대의 사람들이 잘 알겠습니까? 이 성경도 시대가 흐르면서 얼마나 많은 해석들이 넘치고 있는데… 그래서 항상 이 말씀은 기도 가운데, 성령의 역사로 ‘조명’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낡은 가죽 부대가 되어,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담지 못하고 낡은 율법에 매여서,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리석은 인간의 전통에 목 매여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더 거룩하고 더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핵심은 주의 성령과 함께 함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길 뿐입니다. 할렐루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을 따르기 전의 베드로와 같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 문제도, 우리의 삶의 필요도 채울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필요합니다. 성령 하나님 함께 하여 주시고, 우리(나)를 지도해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비봉 중앙교회의 성도로 살아가게 하셨사오니, 우리를 통해서 이 지역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게 하시고, 우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게 은혜 내려 주옵소서! 우리의 가족들과 친지들과 이웃들이 우리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 레위처럼 결단하게 하시고, 포기해야 할 죄악의 모습을 버리게 하시고, 경건하고 또한 주님 안에 자유함으로 참 기쁘고 행복하게 주님을 믿고 따르게 하옵소서! 베드로가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질을 했을 때, 물고기를 가득 거두었듯이, 우리도 많은 열매를 거두기를 원합니다. 주님, 날마다 우리에게 말씀하옵소서! 우리의  구주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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