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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고린도전서] 11-13장 성만찬, 애찬, 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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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회 작성일 2026-07-15 15: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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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s://kor.theasian.asia/archives/395801>

 

  • 애찬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11:17-22)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어떤 이는 항구에서 뱃일에 관련된 일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층민이었고, 어떤 사람은 지식층으로 여유있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문제는 노동자로서 일하는 성도는 일찍 모임에 나오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교제할 때, 미리 준비해온 식사는 항상 여유로운 부자들이 먼저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먹을 것이 떨어져 가는데, 거의 빈 접시를 보고, 늦게 온 노동 계층의 성도들은 심한 박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먹고 취해서, 가슴 아픈 소리를 한 교회 식구에게 퍼부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큰 상처가 되고, 서로 교제의 단절이 이뤄지겠지요. 아마 이런 계층간의 문제가 파벌이 생긴 원인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서로 배려해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식사나 떡은 좀 기다렸다가 함께 하는 것이 좋았을 텐데, 그렇게까지 배려는 못한 것이지요. 오늘날의 교회에도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식당의 봉사는 일부 사람만 하게 되어서, 일하는 분도 불만이 쌓여 있게 될 수도 있고, 봉사하지 않는 일반 성도들 입장에서는 봉사자들이 우선적으로 챙기는 사람만 더 혜택이 돌아가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식탁의 교제를 통해서 더욱 공동체 간의 친밀감과 우정과 사랑을 나눠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식사를 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 성만찬의 의미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11:23-29)

 

 바울 시대의 교회들은 자주 성만찬을 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모임 중에 식사(애찬)에 앞서 성만찬을 한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음식이 있는데, 예수님과 영적으로 함께 한 식사를 성도들이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라고 하면서,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이런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면 되겠습니까? 그럴 바에, 각자 집에서 식사를 먼저 하고 오는 편이 낫지요. 주님의 죽음과 피를 흘리신 의미를 되새기며,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것을 결단하고, 형제들을 더욱 살피는 것이 바른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성찬식은 잘 하고서, 식사에 형제들을 배제시키고 먼저 자기 배를 채우고, 술 취해서 주절거리는 꼴을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실까요? 이 편지에서처럼, 책망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 고린도전서11장 23절부터의 말씀을 보통 우리 일반 교회에서 성찬식에 많이 읽히고 도입하는데, 좀 맞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차라리 복음서의 본문을 읽고 성찬을 진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고린도전서의 부분은 사도 바울이 책망하는 분위기입니다. 이 본문을 사용하면, 항상 우리는 책망받을 성찬식만을 거행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11:30-34)

 

 바울의 영적인 눈으로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파벌이 생기고, 분열이 있으며 서로 배려와 사랑이 없는 것이, 약하고 병들고 잠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문제가 많다고 해서 멸망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주님의 징계가 있고,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사도(바울)가 있어서 먼저 일하게 하시지요. 

 

  • 은사 받은 사람들의 교만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12:1-3)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하게 콕 집어서 말은 하지 않아도 서신을 읽으면 대게 ‘방언’의 은사인 듯 보입니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방언할 줄 모르면,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전혀 아니올시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했던 것 같은데, 대중에게 있을 때에는 그런 방언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말씀을 전했지요. 성령받은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단지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삶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주일을 지키는 것이지요. 남들은 놀러가고 쉬고 잠을 자지만, 주일날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2:4-11)

 

 ‘은사’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신령한 선물인데,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믿음도 은사입니다.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지식, 신유의 은사, 권위, 예언(설교), 분별의 은사, 방언과 방언 통역 등등.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외에도 로마서에도 여러 가지 은사들이 나옵니다. 성경에 나온 은사만 또 은사가 아닙니다. 굉장히 다양합니다. 일반 사람들의 달란트 만큼이나 다양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잘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남의 은사를 달라고 자꾸 때 쓰지 말기 바랍니다. 각자에 맞게끔 주셨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12:12-21) 

 

 교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소중합니다. 그래서 남보고 너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각자 역할과 기능과 일이 다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한 몸된 지체입니다. 신체 여러 기관으로 비유를 들었습니다.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한 몸이 아니지요.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2:22-31)

 

 (예화) 어느 날 한 몸의 지체들이 서로 불평과 불만을 늘어 놓습니다. 손이 이야기 합니다. 

  “나는 하루 종일 무거운 짐을 들고 나르면서 얼마나 힘든 지 몰라. 일을 하도 많이 해서 물집도 잡혔어. 이것 봐~!”  

 

  그러나 발이 한 소리 합니다. 

 “나는 너희들을 지탱하고 있느라 얼마나 힘든 지 몰라. 하루 종일 서 있다고. 내 발바닥은 딱딱하게 굳어 졌어.”

 

 귀는 하루 종일 시끄러운 소리를 듣는다고 불평합니다. 좋은 소리, 아름다운 소리만 들으면 좋을 텐데, 너희들의 불평과 불만의 목소리까지 듣는다면서, 아우성입니다. 

 

 그러다가 불평의 화살이 ‘입’에게 쏟아집니다. 

 “야! 너는 하루 종일 맛있는 것만 먹고 좋겠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 껏 내뱉잖아! 스트레스도 풀고 얼마나 좋아!” 

 

 그래서 ‘입’이 다른 지체들에게 미안해졌습니다. 그 뒤로 ‘입’이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러자, 점점 다른 지체들이 힘이 빠지는 것입니다. 손을 들 힘도, 발이 걸을 힘조차 다 빠져 버립니다. 그리고 ‘눈’은 감기고, ‘귀’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지요. 

 

 바울이 여러 가지 은사를 말했지만, 꼭 있어야 하고 가장 귀한 은사를 이제 소개합니다. 13장에서.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 성도에게 꼭 필요한 최고의 은사 ‘사랑’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13:1-3)

 

 ‘사랑’이 없는 방언이 무슨 소용일까요? 믿음도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그 믿음이 가치가 있습니까? 결혼을 앞둔 남녀가 매일 사랑한다는 말 대신, 맨날 ‘믿는다’고 고백한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가정이 이뤄지겠습니까?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사랑의 결실을 맺어야지요. 하나님 앞에 매일 기도할 때마다 ‘믿는다’고 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최고의 고백은 ‘사랑합니다’ 입니다. 그 사랑 안에 이미 ‘믿음’도 들어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13:4-7)

 

 하나님 또는 예수님의 우리에게 대한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이런 사랑을 하지 못했지요. 사랑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고, 지금도 만들어지지만, 이 말씀 속에 나타난 이 사랑의 분석이야 말로 최고의 분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3:8-13)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앞으로 설교도 필요 없어집니다. 다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되고, 지식도 생기면 무엇을 더 배우겠습니까? 그 다음부터 하는 일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양육하고 일하고 사랑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려서는 배우고 익히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만, 장성해서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양육하고 기르고 본을 보이고 사랑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자라면, 더 이상 배우고 가르침을 받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섬기고 나누고 사랑하는 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자라고 성장하면, 전도하고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섬기고 사랑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만, 또 자녀에게서 사랑을 받지요. 작은 사랑을 받으면서 얼마나 기쁩니까?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주님께 보여드릴 수 있는, 표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고, 여전히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고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서 원망과 불평이 많은 우리들입니다. 속히 우리의 심령이 자라서, 주님의 사랑을 알고, 우리도 아버지 뿐만 아니라 형제, 자매 이웃도 사랑할 수 있는 성숙한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말씀을 듣게 하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언제까지 젖을 먹어야 하는 저희들입니까? 장성하여서 아버지의 일을 돕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식과 능력과 지혜와 여러 가지 필요한 은사들을 더해 주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성도를 섬기며, 우리의 몫을 감당케 하옵소서!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게 하시고, 교만하여 분열하고 다른 이들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는 겸손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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